[영적인 실천 39] 그리스도인의 출발
3. 위대한 변화(5)
우리가 지금 취급하기를 제안하고 있는 제목을 묘사하는 말로는 '은혜의 이적'(the miracle of grace)이 가장 적절하리라고 본다.
첫째로, 그것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해 산출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지, 그것에 대해 호의적으로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만 가치가 있는 심오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세째, 그 역사는 인간 지식의 한계 밖에 있는 심오한 신비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은혜의 이적;이란 표현은 단지 이 이적의 한 국면에 대한 언급에 불과한 용어들, 즉 '중생' '회심'등의 용어 모두를 포함하는 추상적이고 객관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더욱 더 이 은혜의 이적이란 표현은 그것의 기원자인 하나님께 적절한 영광을 돌려보내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구원이라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모든 기구나 수단들의 - 그것들을 기뻐하시든 혹은 싫어하시든 간에 - 유일한 기원자이시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은혜의 이적'이란 것은 그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역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지 단지 그들을 거듭나게 하시는 그의 우선적인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은혜의 이적이 "자연인"(고전 2:14)을 "영적인 사람"(고전 2:15)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못 미칠 수 없다. 오직 전능하신 힘만이 사단의 노예를 해방시켜서 그리스도의 나라로 이주시킬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만이 "불순종의 자녀"(엡 2:2)를 "순종의 자녀"(벧전 1:14)로 변형시킬 수 있다.
육적이고 하나님께 적대적인 마음을 충성스럽고 호의적인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인간능력 밖의 일이다. 그리고 인간은 초자연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심지어 그것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조차도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전반에 걸쳐서 흩뜨려 놓으신 진리로부터 힌트의 빛을 받음으로써만 올바른 개념을 획득할 수 있다.
우리의 눈이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은 분무되는 진리의 빛 모두를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어두운 유리를 통하여 보며, 또 부분적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우리가 우리의 무지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고 있을 때가 좋은 때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위대한 변화가 하나님의 이기적인 능력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것이 다소 불가사의한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불가해한 신비로 가려져 있다. 심지어 인간의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때조차도 그렇다.
생명, 자연적인 생명, 그것의 기원, 성질, 진행과정 등은 가장 유능하고 주의 깊은 탐구자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영적인 생명의 경우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유한한 마음이 파악할 수 없다면,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되는 과정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어떻게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주님께서도 새로운 출생은 신비한 일이라고 선언하신 바 있다. "바람이 임의로 불때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바람은 가장 박학한 과학자라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의 성질, 그것의 지배법칙, 그리고 그것의 원인 등은 모두 인간 인식능력의 밖에 있다. 그것은 새로운 출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생은 거만한 이성의 진단도 허용하지 않고 또한 신학적인 분석에도 무감각해 하는 심오한 신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난(危難)에서 건져주실 때 그의 영혼 속에 발생한 것들을 명확하고 충분하게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심각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성경 교육을 잘 받은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그의 지상의 순례생활의 종국에 이르러서는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욥 34:32)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신학자와 성경교사조차도 그리스도의 학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학생에 불과하다.
그들도 진리의 지식을 점차적으로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사 28:10) 습득한다. 그들도 역시 서서히 진보한다.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연구한 후에는 다른 주제를 연구한다. 때때로 자기들의 초창기의 이해와 견해를 수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해의 빛이 그의 어떤 한 견해에 비춰졌을 때에 가능하다.
그런 일은 필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한 세트(a uint)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진리의 어떤 한 부분을 잘못 이해한다면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도 그릇되이 인식하게 된다.
신학자나 성경교사들도 학생에 불과하며, 진리의 지식을 점차적으로 습득한다는 말을 듣고 놀랄 필요는 없다.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돋는 햇볕처럼 영적인 빛도 설교자와 청중 모두에게 점차적으로 비춰진다.
하나님에 의하여 성도들을 먹이고 세우는 일에 크게 쓰임받은 사람들조차도 그 사역을 위한 준비가 처음부터 완벽히 갖춰졌던 것은 아니다. 장기간의 끈질긴 연구에 의하여 진리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 참된 영적 성장을 경험한 설교자도 그의 첫번 설교가 풋나기의 설교였음을 회상하면 그의 미숙함과 무지가 생각나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해 심각한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성경주석에 있는 많은 곡해, 다양한 불일치와 모순들을 이제 분명히 인식하기 때문이다. 충만한 지식과 성숙한 경험은 그를 충동하여 그룻된 것들을 개정하게 한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