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시리즈/영적인 실천 (Practical Christianity)

[영적인 실천 37] 그리스도인의 출발

En Hakkore 2024. 4. 19. 11:37

3. 위대한 변화(3)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 언약의 일군들 - 3:6)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18절).

이 구절 또한 많은 인기있는 주석들이 잘못 해석하도 있다. 18절이 '그리고'로 시작하는 것을 당연히 주의해야만 한다(원문과 영어 번역에는 '그리고'가 있으나 개혁 성경에는 없음...역자 주). 그것은 사상의 계속적인 흐름을 지시한다.

하나님께로 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된 우주나 혹은 그의 섭리 기능이 아니고, 13저레서부터 언급된 특별한 것들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상취하신 모든 것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은 시대적인 변화, 그리고 새 언약의 일군들의 전파 등인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의 창안자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대표하신 사람들을 위해 성취하신 모든 것의 결과는 '화목'이다. 이 화목은 칭의와 같이 전적으로 객관적인 것이지 중생과같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화목은, 이 교리에 관한 논문에서 충분히 보여준 바와같이 전적으로 관계에 관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의 진노를 철회하시고 우리와 더불어 평화를 누리신다.

"또 우리에게(그의 대사들)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18, 19절).

여기서부터 6:10까지 사도는 이 '직책'의 구성요소들을 열거한다. 먼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하신 것"은 단지 변절한 유대교만이 아니라 소외된 '세계'도이다. 14,15절의 "모든 사람". 즉 은혜로 택함받은 사람 전부이다. 그리고 그는 '화목'의 부정적인 면, 즉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심'에 대해 언급한다. 그것은 또한 법적인 면이다.

화목제의 적극적인 면은 21절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화목은 전적으로 객관적이고 법적인 것이지, 어떤 점에서도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것은 아니다. 사도가 "새로운 본성을 그들에게 분배하심으로써 하나님 자신과 세상이 화목되었다"라고 말하거나 "그들이 죄를 제거함으로써 화목케 되었다"고 말하지 않은 점을 주의하라!

이 전체 구절들이 취급하고 있는 것은, 화목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행하신 일이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신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17절로 돌아가자. 선행 구절들 안에 확립된 사실들을 고려해 보면 '그런즉'(therefore)이란 말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는 말 앞에 나오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었다.

그는 부활의 터 위에 서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언약의 머리로서 계시는 새로운 피조물계의 한 지체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는 완전히 새로운 언약 밑에 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추출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결론이다. 즉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옛 언약 아래서 중요시됐던 자연적이고 민족적인 차별은 부활의 터 위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런 차별은 육체와 연관되었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 즐기는 특권과 획득하는 관계는 전적으로 영적인 것이다. 이와같이 신앙에 의해 명뱍하게 깨달음으로써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말았다.

유대교로부터 기독교에로의 혁명적인 전환과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련을 파악하는 일은 오늘날 사는 우리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변화이다. 왜냐하면 1500년 간 이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호의를 입은 한 나라로 제한되었고, 그 기간동안 모든 다른 민족들은 그들 자신의 길을 따라 살도록 내버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이방종교 사이에 있는 간격은 로마 가톨리과 정통 기독교 사이의 차별의식은 인도의 각 카스트(cast) 간에 있는 차별의식보다 더 엄격하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모세 언약은 '사라졌고', 중간의 담도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길로 가지 말라"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너희는 전 세상으로 가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으로 바뀌었다. 유대교를 매우 명백하게 특징지웠던 육신적 관계는 이제 영적인 관계로 대치되었다. 그런데 개종한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심히 어려웠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 사실을 입증하는 일을 위해 할애되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의 주요한 의도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 서신에서 사도는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옛 언약'과 그 옛 언약의 예배의식, 그리고 그 언약과 관련된 독특한 특권 등은 모두 효력을 상실했으며, 보다 새롭고 좋은 언약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거기서 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심에 비례하여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다"고 선언되고 있다. 그리고 새 언약이 선포된 예레미야 13장으로부터 인용을 한 후에 첫 것은, 즉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히 8:6-11).

옛 것에 대한 새 것의 탁월성은 매우 상세하게 언급된다. 전자는 단지 당대적인 것이지만 후자는 영원한 것이다. 전자는 미래에 오는 좋은 것의 그림자이나 후자는 실체이다. 아론의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 그리고 땅의 기업은 하늘의 기업으로 대치되었다. 둘 사이의 축복된 재조는 히브리서 12:18-24에 충분히 제시되어 있다.

Arthur W. Pink 영적인 실천 p107